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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준의 <영화속 父性 읽기> - 과속 스캔들
2017-08-24

남자에서 아빠로 !

 

남자들은 흔히 사춘기가 시작되는 중딩 시절 옆집 누나 또는 여선생님과의 몽환적 사랑을 꿈꾸곤 한다. 국어사전에 성애와 관련된 단어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격렬하게 호르몬이 분비되는 시절이라는 걸 아내 또는 아들가진 엄마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화, ‘과속 스캔들이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의 사고친 친구들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남현수(차태현)는 그런 중딩 시절을 제대로거친 서른 중반의 잘나가는 독신 연애인으로 출연한다.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인 그에게 애청자를 자처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왔던 미혼모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다. 그것도 6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20여년 전 차태현이 5살 연상의 옆집 누나와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미혼모이다. 결국 그녀의 주장이 진실임이 밝혀지면서 30대 중반의 독신남과 미혼모인 그의 딸 그리고 6살배기 아이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결혼도 안한 화려한 싱글 생활을 만끽해오던 주인공은 졸지에 할아버지가 되고, 그의 인생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부성(父性)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자식에 대해서는 물론, 여자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던 어느 철부지가 날벼락처럼 날아온 딸 그리고 손자와 엮이게 되면서 조금씩 부성에 눈뜨게 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부성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Margaret Mead는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이 자기자신만을 향하던 사랑을 점차 주변 사람들을 향하게 되는 것, 자기애(自己愛)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도 잘 나가는 싱글남의 보름달 같았던 자기애는 딸과 손자를 만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반달로 바뀌어 간다. 급기야 공개방송 중에 손자 기동이가 사라져 딸이 절규하며 남현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숨겨진 엄청난 과거를 까발리지 않으려면 울부짖는 딸을 외면해야 하고, 자신의 손자가 되는 그녀의 아들의 실종도 모른 체 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남현수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무대를 뛰쳐나간다.

부성은 또 진정한 사랑에 눈뜨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임을 강조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라는 유행가를 일찍이 독일에서 불렀던 셈이다. 우리는 부모가 되기전에는 오로지 자신만을 돌보면서 그저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될 수만 있다면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식을 낳고 나면 주는 사랑에 사로잡히게 된다. 남자에게는 부성애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여자에게는 모성애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에리히 프롬은 보호, 책임, 존중, 지식을 사랑의 4가지 속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속성을 통하면 부성()가 보다 잘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속성이 보호이다. 마치 강아지를 키우면서 먹을 것을 주고 잠잘 곳을 챙겨주지 않는다면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현수는 날벼락 같은 딸과 손자를 적어도 내쫒지는 않으면서 이른바 보호는 하고 있다. 처음부터 부성의 기초적 토대는 갖춘 인간인 셈이다.  

둘째 속성은 책임이다. 책임은 영어로는 responsibility인데, 지금도 i가 몇 개 들어가는지 헷갈리고 있는 이 단어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왠지 우리말과는 좀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制裁)’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동어반복 같고 자갈 씹는 듯한 설명이다. 그런데 책임을 다른 사람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라는 프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책임의 의미가 확 와 닿았다. 그리고 반응하다라는 뜻을 가진 response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잘 이해된다. 특히 표현되지 않은 요구에도 반응하는 것이 책임이라는 지점에서 고개가 자동인형처럼 끄덕여 진다. 그러니 아이들의 표현되거나 표현되지 않은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책임이다. 남현수는 엄마의 성을 이어받은 딸 황정남의 요구에 조금씩 더 반응하고 있다. “나는 너 원한 적 없어!”라는 말을 내뱉었던 남현수였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가수로서 성장하고픈 딸의 요청을 인정하고 응답하면서 아버지로서 거듭나는 모습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셋째 속성은 존중이다. 존중을 뜻하는 영어 respect의 어원은 respicere인데 바라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프롬은 존중이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즉 아버지 남현수는 미혼모인 딸 황정남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면서 딸의 재능을 살리는 가수의 길을 가도록 돕는다는 결말도 주인공이 부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만일 이 존중이 없다면 아버지들의 책임은 지배와 소유로 타락하기 쉬울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사이 아버지로서 내 딸에게 가장 유의하고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대학생인 내 딸의 자의식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하루는 딸에게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것에 대해 비평을 늘어놓았더니 왜 다른 사람의 시선을 그렇게 의식해야 하느냐아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자기는 개의치 않는다고 대꾸했다. 내 의식속에 웅크리고 있는 남녀간 불평등을 예민하게도 냄새맡은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나는 딸의 화장을 자해 화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쁘고 귀여운 자기 얼굴을 작정을 하고 망쳐 놓곤 한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고유성(uniqueness)을 강조했던 건 아닌지 반성마저 하게 된다. 어쨌든 내 기준으로는 영 아니어도 딸의 판단과 깨달음을 믿어보려고 용을 쓰고 있다. 많은 경우 딸이 아직 덜 여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수평적 부녀관계를 만들어가려고 애쓰다 보니 나의 바람을 딸에게 전달하기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역시 존중은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존중하려면 그 사람을 잘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의 네번째 속성으로 지식을 꼽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자기 아이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아버지가 아이를 사랑하려면 아이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를 지켜봐야 하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자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니,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매우 취약한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아버지운동을 하면서 단체를  함께하는 아버지들이라고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함께해야 관찰이 되고 최소한의 관찰을 해야 아이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면 이런 점에서 남현수는 당연하지만 아버지의 자격이 없다. 하지만 점차 어색하고 불편했던 동거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속으로 녹아들면서 함께 하는삶으로 변모해간다. 그래서 이 영화 과속 스캔들은 부성을 발견해가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재미, 감동, 유쾌하고 개운한 스토리에 생각해볼 거리까지 제공하고 있는 이 영화, 아직 아버지가 되지 않은 남자들도 한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