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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준의 <영화속 父性 읽기> - 허삼관
2017-07-26

현대 중국의 대표적 소설가 위화가 쓴 ‘허삼관 매혈기’는 우리 온 가족이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영화 허삼관으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는 중국적 정서가 듬뿍 담겨 있기 때문에 소설의 느낌을 그대로 담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뭔가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는 이 이야기를 국적 불명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풀어내고 만다. 아쉽지만 이 지점에서 흥행이 실패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차라리 완전히 중국인의 정서, 애환과 해학을 살뜰하게 담아냈다면 오히려 괜찮지 않았을까? 아무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오는 명절에 TV로 볼 기회가 많다는 경험칙에 허삼관도 부응하였다. 명절 안방극장에서 본 것만 해도 두세 번 되었던 것 같다. 영화에선 국내의 탑 배우인 하정우와 하지원이 주인공을 맡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허삼관은 결혼을 하기 위해 또 가족부양을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서 팔곤 한다. 첫눈에 반했던 허옥란을 아내로 얻은 허삼관은 피를 팔아가면서 다복하게도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이름은 일락이, 둘째는 이락이, 세째는 삼락이 이다. 즐거울 락() 자를 써서 아들들의 이름을 붙인 것만 봐도 허삼관의 아들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남편 허삼관은 그 중에서도 첫째 아들 일락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결혼 후 십년 가까이 열심히 살아오던 어느 날 장남 일락이가 결혼전 아내 허옥란이 불가피하게 가지게 된 남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하소용이라는 날건달 같은 사내의 핏줄임을 알고는 분을 이기지 못한다. 중국인의 해학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허삼관은 모든 삶의 모습을 그대로 둔 채로 장남 일락이의 존재만 자신의 일상에서 덜어내 버리려고 한다. 발단을 파헤치고 바로잡으면서 온몸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현재의 결과에서 일락이만 간단히 삭제하고는 그냥 삶을 천연덕스러이 살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서서히 장남 일락이에게 향했던 그리고 켜켜히 쌓아갔던 자신의 부정(父情)은 결국 자신이 마음먹기 나름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허삼관은 일락이를 다시 아들로 인정하게 된다는 스토리로 해피엔딩된다. 부성(父性)이란 결심하는 그 어떤 것임을 경쾌하고 해학적으로 그려내면서…!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허삼관이야기는 독자 내지는 관객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이런 해피엔딩을 억지로 꾸민 걸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낳은 정이기 보다는 기르는 정이라는 속성이 강하다는 부성(父性)의 정체를 우리에게 웅변해주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자식은, 아버지가 누구이든 간에(?), 100% 자신의 핏줄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좀 다르다. 아버지가 10달 동안 어디 출장을 갔다 와도 아이는 멀쩡하게 태어나 있다. 이렇게 서로의 삶은 분리된 채로 부자간의 관계는 시작된다. 게다가 배우자가 낳은 아이가 100% 자기 핏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출생의 비밀’이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의사들은 유전자 검사로 또 변호사들은 친자확인소송으로 돈을 버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마더스 베이비(mother's baby)에 대비되는 말이 파더스 메이비(father's maybe)라는 우스개가 영어권에 존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허삼관에서 2% 부족했던 리얼리티를 보충해주는, 일본 최고재판소 법정에 나타난 실화를 보자. 2009년 홋카이도에서 한 여성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했고, 진실을 알지못한 남편은 결혼 10년만에 얻은 이 아이에게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이듬해 부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고, 아내는 이혼과 함께 DNA감정결과를 근거로 법률상의 친자관계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DNA감정결과는 남편이 아이의 친부가 아닐 가능성이 99.99%였다. 그에 따라 그녀는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하지만 남편은 “DNA감정결과가 그렇더라도 그동안 키워온 아이에 대한 사랑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내 자식이라 부르고 함께 목욕하고 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추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헤어지던 날,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흔들던 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며 상고를 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이 여성을 향해 콧김이 거세지는 분들이 꽤나 될 것 같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 사건이 질문하고 있는 부성(父性)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자.

 

부성은 그 출발부터 모성과 사뭇 다르다. 아버지라는 존재에게는 아이가 내 자식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매우 이성적인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부성애가 비로소 발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Luigi Zoja)는 자연발생적이고 감성적인 모성과는 달리, 부성에는 상당한 의지와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태어난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고 그 아이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바탕으로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부성애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성애는 야만속에서도 존재하지만 부성애는 문명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부성애는 자식이 탄생하는 순간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장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자연에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배워야 하는 어떤 것이다. 하나의 결단이며 결연을 수용하는 행위로써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문명 속에서 탄생한 정신적인 각성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여성 문화인류학자 Margaret Mead는 문명이 시초에 남성이 처음으로 여성과 그녀의 자식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던 순간을 부성이 탄생한 최초의 순간이라고 보았다. 또 그녀는 부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제도로 인식했다.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탄생한 정신적인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하늘을 향해 아이를 높이 들어올리는 의례(Suspicere)를 거쳤는데, 이것은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옛날 홍길동도 아버지의 인정을 못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 황수관박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를 말하면서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6.25 당시 어린 황수관의 가족은 피난길에 나섰고, 이고 지고 손을 잡고 가던 도중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졌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논바닥에 벌러덩 홀로 누워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신과 동생들을 감싸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부성애는 모성애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부성과 모성은 열등하고 우월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그 성격이 서로 다를 뿐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엄마라면 누구나 모성애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모성은 본능적이며 매우 자연스럽다. 아이와 엄마는 10달 가까이 한 몸으로 같이 숨쉬고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느낀다. 그리곤 온몸이 어스러지는 산고를 통해 몸 밖으로 내어놓는다. 서로를 또 다른 자기자신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엄마는 아이를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고, 아이의 욕구를 실시간으로 느끼며 아이의 희로애락이 곧 자신의 희로애락이 된다.

 

반면 아빠는 아이가 만나게 되는 최초의 타인이다. 아빠는 아이가 자신이 자식임을 인정하고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겠다는 다분히 이성적인 프로세스를 거쳐서 아이의 아버지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그에 따라 아빠는 엄마에 비해 아이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교육방송의 실험(ebs '아버지의 성 - 아빠의 역습')을 보면 자신의 아이 사진을 볼 때 엄마와 아빠의 뇌는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자신의 아이 사진을 봤을 때 후두엽 쪽 시각의 뇌 부분만 활성화되는 아빠의 뇌와 달리, 엄마는 시각의 뇌는 물론 감정과 정서를 관장하는 변연계까지 활성화됐다. 이것은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인식하는 개념 자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는 다른 아이를 볼 때와는 달리 자기아이를 볼 때엔 좀 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됐지만, 아빠는 다른 아이 사진을 볼 때나 자기 아이 사진을 볼 때 별 차이가 없었다. 즉 객관적으로 아이를 바라본다는 이야기이다. 그 결과 모성애가 무조건적인 반면, 부성애는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상쇄시키는 상황이 올 때에는 사랑을 철회하곤 한다. 그래서 부성애는 모성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건적이다. 모성애에 비해 부성애는 조건적이다? 아버지가 가지는 사랑의 질()이 엄마의 그것에 비해 영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땀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것이 본능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조건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치가 있다. 사실 아버지에게도 자식의 탄생은 낯설게 다가온다. 자식의 잉태를 순전히 엄마에게 위임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만나게 되는 새로운 생명체는 그에게 전적으로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낯선 존재에 대한 배려와 보호 그리고 희생어린 돌봄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 과정은 사회와 문명이 어떻게 발원되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신체적으로 한 몸으로 연결되지 않았다거나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선다는 등의 특징을 지닌 부성이 모성에 견주어 열등하다고 느끼거나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자기애(自己愛)의 한계를 초월해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박애정신의 씨앗을 부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숭고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